톨스토이의 『삶은 사유가 아니라 돌파다』를 샀는데, 아직 펴보지도 못했다.
사놓고 못 읽는 책이 늘어간다. 게을러서라기보단, 요즘 갑자기 찾아온 무기력함과 도파민 숙취 때문에 머릿속 탭이 너무 많이 켜져 있어서인 것 같다. 뇌가 과부하 상태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손이 안 간다.
그런데 웃긴 건, 이 책이 바로 그 ‘머릿속 과부하와 부질없음’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는 거다.
책이 무슨 얘길 하는가
『참회록』과 『인생론』의 핵심을 엮은 책이다. 톨스토이는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다 가진 50세에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평생을 그 영리한 머리로 사유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고, 결국 책상머리가 아니라 묵묵히 땀 흘려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대략 이런 흐름이다.
1부. 무너져라, 새로운 싹이 돋아날 때까지
똑똑한 자의 절망보다 평범한 이의 삶이 더 깊다. 학문과 복잡한 사유는 결국 삶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아는 자보다 묵묵히 밭을 가는 ‘걷는 자’가 진리에 가깝다.
2부. 언젠가 행복할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
‘언젠가 찾아올 100%의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좇으며 오늘을 유예하지 말라. 거품 같은 쾌락과 미래를 좇는 자는 결국 파멸한다.
3부. 사랑으로 모든 벽을 무너뜨려라
인류를 진보시킨 건 투쟁이 아니라 사랑이다. 분노와 욕망은 결국 소진되지만, 조건 없이 내보낸 사랑은 나를 구원한다.
4부. 삶이 흔들리는 이유는 위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생존’하지만 인간은 ‘살아간다’. 삶의 도구를 삶 그 자체와 혼동하지 말 것. 고통과 흔들림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위를 향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5부. 죽음의 공포마저 돌파하라
빛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가 작아지듯, 사랑이 커질수록 허무와 죽음의 공포는 옅어진다.
2부는 내가 정리했던 80% 일상행복 + 20% 여유공간과 정확히 같은 얘기고, 1부는 ‘손끝의 감각 취미’에 대한 철학적 근거다. 이미 몸으로 하고 있던 걸 100년 전 사람이 먼저 써놨다.
궁금했던 것 1. 사랑이 커지면 왜 죽음이 덜 무서워지나
5부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과 죽음의 공포가 무슨 상관인가.
정리해보니 이런 논리다.
내가 허무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근본 이유는 ‘나 자신만을 위한 삶’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내 부, 내 목표 10억, 내 명예. 이것들은 죽음 앞에서 완벽하게 소멸한다. ‘나’라는 개체에만 집착할수록, 그 개체가 사라지는 죽음은 모든 게 끝나는 절대적 공포가 된다.
반면 타인에게 내보낸 사랑은 나라는 존재를 나보다 큰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확장된 만큼 죽음이 가져갈 수 있는 몫이 줄어든다. 빛에 가까워질수록 그림자가 작아진다는 게 그 얘기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도 결국 같은 자리에 도달했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가 붙잡은 건 논리가 아니라 아내를 향한 사랑이었다.
내가 가치관 0순위를 가족에 두고, 조건 없이 베푸는 걸(보육원에 고기 사주기 같은) 프로토콜에 넣어둔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 같다. 이타적인 행위가 결국 나에게 가장 큰 평온으로 돌아온다. 착해서가 아니라, 그게 유한한 삶의 허무를 깨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서.
궁금했던 것 2. 20%의 몰입이 어떻게 ‘돌파’인가
두 번째 의문이 더 컸다.
여백 20%를 통제 가능한(controllable) 행동에 쓰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톨스토이가 말하는 ‘성장’이나 ‘돌파’ 같은 거창한 단어와 연결되나. 가죽 자르고 새벽에 헬스 가는 게 무슨 돌파인가.
내가 ‘돌파’라는 단어를 잘못 읽고 있었다.
톨스토이가 귀족의 옷을 벗고 손수 부츠를 꿰어 신으며 밭을 갈았던 그 소박한 육체노동, 그게 그에게는 돌파였다. 세상을 뒤집는 성취가 아니라,
복잡한 생각의 늪에 빠져 마비된 나를, 100% 통제 가능한 물리적 행동으로 끄집어내는 과정 그 자체.
돌파는 결과물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다. 머리에서 몸으로.
‘성장’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는 흔들림을 위로 올라가는 증거라고 했다. 퀀트 알고리즘이 깨지거나 외주에서 통제 못 할 변수를 만나 무력해질 때, 주저앉아 번뇌를 복습하는 대신 20%의 여백으로 들어가 묵묵히 내 손끝을 제어하는 그 끈질긴 태도. 그게 성장이다.
거창한 돌파는 이미 새벽 서재에서 가죽을 재단하는 그 조용한 시간 속에 구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하루키
여기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올랐다.
하루키는 매일 정해진 양의 원고를 쓰고, 달리고, 수영하고, 책을 읽다가 일찍 잔다. 핵심은 글이 아무리 잘 써져도 정해진 분량을 채우면 무조건 펜을 놓는다는 것.
처음엔 그냥 성실한 루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다른 얘기다.
하나. 지적 노동의 강제 셧다운.
글쓰기는 뇌를 극도로 소모하는 지적 노동이다. 개발이나 퀀트 설계랑 똑같다. 이 사유가 길어지면 필연적으로 ‘내 책이 성공할까’ 같은 통제 불가능한 결과에 대한 번뇌로 넘어간다. 하루키는 그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효율성의 스위치를 강제로 끄는 단절 지점을 만들어뒀다.
둘. 머리의 과부하를 몸으로 씻어내기.
펜을 놓고 그가 선택한 달리기와 수영은 100% 통제 가능한 행위다. 톨스토이의 밭 갈기와 완전히 같은 자리다. 숨이 차오르는 육체적 부하에 몰입함으로써 머릿속 탭들을 강제로 닫는 것.
셋. 빈 시간의 저주를 막는 시스템.
그의 하루는 원고 → 달리기/수영 → 독서 → 이른 취침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잡념이 끼어들 틈 자체가 없다.
결국 남은 결론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하루키도 톨스토이도 자기 머리와 의지력을 믿지 않았다. “번뇌하지 말아야지”, “폰 보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은 뇌가 방전된 상태에서 100% 실패한다. 그래서 그들은 뇌가 번뇌를 복습하기 전에 몸이 먼저 궤도를 이탈하도록 물리적 시스템을 일상에 박아넣었다. 의지가 아니라 반복과 루틴으로.
둘. 생산성과 효율을 추구하며 뇌를 극도로 쓰는 사람에게 빈 시간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쉬운 도파민을 찾아 헤매거나 번뇌를 복습하는 취약 시간대다. 나는 이걸 ‘빈 시간을 참을 수 없는 저주’라고 불렀었다.
셋. 그래서 허무주의는 더 깊은 사유나 더 뛰어난 논리로 풀리지 않는다. 땀 흘리고, 부츠를 꿰매고, 원고지를 채우는 것. 지금 이 순간 100%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 행동으로 하루의 뼈대를 촘촘히 채울 때, 허무는 들어올 틈을 잃고 증발한다.
책을 아직 못 폈지만, 어쩌면 이미 절반은 읽은 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 한다는 강박은 내려놓기로 했다. 그냥 곁에 두고, 새벽 서재에서 뇌를 비우고 싶을 때 훑어보며 “오늘 내 여백 20%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문장 딱 하나만 캐내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려 한다.
남은 숙제는 하나다.
하루키가 원고지 앞에서 펜을 놓듯, 나도 뇌가 과부하되기 전에 본업의 스위치를 끄는 나만의 종료 규칙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내 하루에서 가장 취약한 빈 시간이 언제인지 찾아, 거기에 쐐기처럼 박아둘 물리적 루틴 하나를 고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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