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벌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요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얼마 전 이 기사를 읽으며 더 또렷해졌다.

오랫동안 내 삶의 질문은 “얼마나 벌 것인가” 였다. 숫자가 곧 목표였고, 채워야 할 잔고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질문의 결이 바뀌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전환이 거창한 깨달음 같은 건 아니다. 그저, 숫자의 세계에서 가치의 세계로 시선이 옮겨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서 만난 생각들을 오늘 정리해두려 한다.

 

1일 1경험, 그런데 그게 또 강박이 되면

한동안 ‘1일 1경험’을 떠올렸다. 매일 하나씩 새로운 걸 경험하며 사는 삶. 멋져 보였다. 그런데 곧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하나는 “도전이라기엔 너무 큰 결심이 필요한데”, 다른 하나는 “매일 한 가지는 꼭 해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이 생기겠는데”.

생각해보면, 1경험을 꼭 스카이다이빙이나 새로운 맛집 같은 외부 이벤트로 채울 필요는 없다. 사실 나는 이미 그 답에 가까이 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회사를 다니고, 비슷한 루틴을 반복하는데도 이상하게 단 하루도 똑같지가 않다. 어떻게 매일 다른 일이 일어나는 걸까?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설 수 없다” 고 했다. 강물은 흐르고, 나라는 사람도 매일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로움은 밖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출근길 하늘색이 어제와 달랐다는 것을 알아채는 일. 이미 그 다름을 알아채고 있다면, 1경험은 이미 매일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채워야 할 숙제가 아니라.

 

0순위는 가족, 그리고 덤벼드는 어려움들

내 가치관의 0순위는 분명하다. 가족이다. 가족과의 삶이 중심이고, 그 바깥에서 덤벼드는 어려움들을 좌시하지 않고 이겨내며 나아가고 싶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일을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눴다. 닥쳐오는 시련은 내가 고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어떤 태도로 마주할지, 그리고 내 곁의 가족은 내가 지킬 수 있는 영역이다.

가족이라는 뿌리가 단단하면, 바깥의 어떤 시도가 흔들리거나 실패해도 돌아올 베이스캠프가 있다. 그렇게 보면 덤벼드는 어려움은 나를 무너뜨리는 파도가 아니라, 나를 더 단단하게 가는 숫돌에 가깝다.

 

행복한데, 만족을 모르겠다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모순은 이거다. 나는 분명 행복함을 느낀다. 그런데 만족을 모르는 것 같다. 행복의 ‘full’을 인지할 수 있을까? 꼭 가득 채워야 한다는 강박이 어딘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두고 “결핍되면 고통을 느끼고, 충족되면 권태를 느낀다” 고 했다. 행복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건 내가 유별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더 나은 상태’를 갈구하도록 설계돼 있어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문제는 ‘full(100%)‘이라는 환상이다. 행복은 꽉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흘러가는 ‘과정’에 가깝다. 컵에 물이 100% 차는 순간, 그 물은 더 이상 새로워질 수 없고 그저 고인다. 오히려 70~80%만 채워져 있어 매일 새로운 경험과 가족의 사랑으로 채울 여백이 남아 있는 상태가, 어쩌면 가장 건강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만족을 모르는 게 결핍이 아니라, 채울 여백이 남아 있다는 신호라면. 그건 꽤 견딜 만한 모순이다.

 

한 줄로 남겨두는 다짐

생각이 많은 건 그만큼 삶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니 그것마저 축복으로 두기로 한다.

완벽한 100%의 하루를 채우려 애쓰기보다, 가족이라는 중심을 잡고 매일 조금씩 다르게 흐르는 일상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살아보기로. 강박은 내려놓고, 다가오는 어려움은 기꺼이 맞이하면서.

얼마나 벌 것인가는 여전히 내 삶의 한 축이다. 다만 그 위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더 큰 질문을 얹어두기로 했다. 오늘도 하늘색은 어제와 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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